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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봉 성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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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자봉 성황제 사진

군자봉 성황제

소재지
군자봉 정상

시대
고려 초(추정)

군자봉은 행정구역상 시흥시 군자동과 장현동ㆍ능곡동 사이에 위치한 높이 199m의 산으로서 옛 시흥군의 군자면, 현재의 군자동 등 주변 지역을 대표하는 명칭으로 널리 쓰이고 있다. 이 산에서 성황제를 지냈다는 것은 조선 전기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이미 등장하고 있으며, 조선 후기에 편찬된 『여지도서(輿地圖書)』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군자봉 성황제는 조선 초기에 국가의 공식 기록물에 존재가 언급될 정도로 이 지방에서는 널리 알려진 존재였으며, 최소한 500년 이상 된 전통 있는 성황제이다. 하지만 군자봉에서 모시는 성황신(城隍神)이 김부대왕, 즉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敬順王)이라는 점은 우리나라에 ‘성황신앙(城隍信仰)’이 전래된 고려시대에 이미 시작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성황제의 절차는 제례의식을 시작으로 부정풀이, 산신맞이, 불사거리, 장군 신장거리, 상대감거리, 별상, 대신거리, 뒷전 등으로 이어지며, 성황제가 끝나면 주민들이 한데 어울려 춤을 추며 여흥을 즐긴다.

군자봉 성황제와 관련한 대표적인 전승은 다음과 같다.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경순왕의 부인인 순흥 안씨가 난을 피하여 군자봉 아래에 있는 친정에 살았는데 경순왕의 승하 소식을 듣게 되었다. 난중이라 갈 수 없어 군자봉 정상에 초막을 짓고 3년 동안 남편의 명복을 빌었다. 그랬더니 어느 날 밤 꿈에 경순왕이 나타나 부인의 정성을 치하하고 한 가지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하고 사라졌다. 안씨는 평소 반신불수인 몸종을 불쌍히 여겨 왔는데 꿈에서 깨어보니 몸종의 병이 나아 있었다. 이 소문을 들은 마을사람들이 군자봉의 정상에다 성황당을 짓고 경순왕의 위패를 모시고 소원을 빌었다 한다.”여기서 군자봉 성황제의 주신이 김부대왕이란 사실도 우연이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안산(군자봉 지역은 조선시대에 안산군에 속하였음)의 김씨는 신라 경순왕, 즉 김부대왕의 넷째 아들 대안군 김은열의 후손인 김긍필(金肯筆)을 시조로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으로 볼 때 군자봉 성황제를 천년의 전통이 깃든 유서깊은 행사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한편 성황제는 단순히 무당에 의해 주도되는 굿이 아니다. 성황신은 한 고을을 수호하는 지역수호신으로서 우리 조상들은 고려시대 이래 고을의 번영과 주민의 안녕을 성황신에게 빌어왔고, 그렇게 비는 절차가 바로 성황제였다. 따라서 시흥시의 발전과 시흥시민의 안녕을 군자봉 성황제를 통해 성황신에 비는 것은 무속적인 것이 아니라 고려시대 이래 백성들의 소박한 기원풍습을 계승하는 중요한 의의를 가진 것이며, 더욱 가다듬고 발전시켜 나가야 할 소중한 역사문화적 자산인 것이다.

군자봉 성황제 유가행렬(遊街行列)
유가(遊街)란 말 그대로 골목골목을 돌며 유희(遊戱)를 벌이는 것을 말하는 데 군자봉 성황제의 유가는 성황제를 매년 음력 10월 3일 지내고, 이듬해 2월부터 군자봉의 성황신을 상징하는 ‘서낭대’를 모시고 인근 마을을 돌았다고 한다. 이때 길게는 3개월 이상 각 마을을 돌았는데, 일제강점기에는 현재의 시흥시 지역은 물론 멀리 서울 영등포까지도 갔었으며, 수원의 평동 벌말 도당도 군자봉 성황인 경순왕이 유가를 돌다가 잠시 쉬었다고 해서 그 곳에 당을 짓고 매년 도당굿을 거행하고 있다는 전승에서 수원까지도 군자봉 성황신의 유가가 이르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주민들이 서로 자기 집으로 성황신을 모시려고 다투기도 하는 등 여러 가지 전승이 남게 되었는데, 이것은 그만큼 한강 이남의 경기 남부지역에서 군자봉 성황신의 영험함에 대한 주민들의 믿음이 있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군자봉 성황제의 유가는 「경순대왕(敬順大王)」이라 쓴 깃발을 앞세우고 그 뒤를 성황신을 상징하는 높이 약 10m에 오색천으로 장식한 서낭대가 따르며, 악사, 무당, 풍물패, 서낭대를 모시고자 하는 집 주인, 일반 주민이 차례를 이었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