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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유 선생 묘 및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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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유 선생 묘 및 신도비 사진

장유 선생 묘 및 신도비

지정번호
향토유적 제2호

지정일자
1986년 3월 3일

소재지
조남동 산1-5

시대
묘 - 인조 16년(1638), 신도비 - 숙종 2년(1676)

소유자
국유ㆍ사유

덕수장씨 종중
덕수장씨 종중

장유(張維, 1587~1638)선생은 조선시대 문신이자 문장가로, 자는 지국(持國), 호는 계곡(谿谷)ㆍ묵소(黙所)이며, 본관은 덕수(德水)이다.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에서 자결하였던 김상용(金尙容, 1561~1637 우의정 역임)의 딸을 아내로 맞아 낳은 딸이 봉림대군(鳳林大君, 훗날의 효종)과 혼인하여 인선왕후(仁宣王后)가 됨으로 인하여 신풍부원군(新豊府院君)에 봉해졌다. 광해군 원년(1609) 증광시(增廣試)에서 을과(乙科) 1등으로 급제하여 승문원 검열, 주서 등의 관직을 거쳤다. 광해군 때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에 연루되어 파직되었으나,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에 참여하여 12년 만에 조정에 복귀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에 책훈되었고, 대사헌(大司憲), 이조판서(吏曹判書), 나주목사(羅州牧使), 예조판서(禮曹判書) 등을 역임하였다. 인조 15년(1637) 우의정(右議政)에 임명되었으나, 모친상을 이유로 18차례나 상소를 올려 인조의 윤허를 얻어내었고, 이듬해 신병이 깊어져 52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다. 효종 6년(1655)에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되었고, 문충(文忠)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천문(天文)·지리(地理)·의술(醫術)·병서(兵書) 등 각종 학문에 두루 능통하였고, 서화와 특히 문장에 뛰어나 이정구(李廷龜), 신흠(申欽), 이식(李植)과 더불어 조선문학의 사대가(四大家)라는 칭호를 받았다. 많은 저서가 있었다고 하나 대부분 없어지고, 현재 『계곡만필(谿谷漫筆)』, 『음부경주해(陰符經註解)』 등이 전해진다.

봉분 앞에는 묘비와 그 앞에 혼유석ㆍ상석ㆍ향로석이 놓여 있고 좌우에 문신석인 두 쌍과 망주석이 배치되어 있다. 신도비는 묘역에서 서쪽으로 약 70m 떨어져 있는데, 규모는 높이 2.65m, 폭 1.3m, 두께 32cm이며, 비개(碑蓋)는 옥개(屋蓋) 위에 용(龍)이 조각되어 있다. 이 신도비는 길이 4.4m, 폭 2.5m, 높이 1.3m 규모의 귀부 위에 세워져 있는데, 우리나라의 신도비 중에서 가장 큰 규모의 귀부를 갖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묘소에는 현종 어제(御題)의 표액(表額)과 그의 아들 선징의 음기(陰記)로 된 표석 및 정두경(鄭斗卿)이 찬(撰)한 지석이 있다. 숙종 2년(1676) 10월에 세운 이 신도비의 비문은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송시열(宋時烈)이 짓고, 글씨는 청평위(靑平尉) 심익현(沈益顯)이 썼으며, 전자(篆字)는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 김만기(金萬基)가 하였다.

묘역 주변에는 선생의 부친 장운익(張雲翼, 1561~1599 이조판서) 신도비를 비롯하여 아들 장선징(張善澂, 1614~1678 예조판서), 손 장훤(張楦, 1635~1686 천안군수), 증손 장진환(張震煥, 1646~1722 예산현감) 등의 묘가 있다.

묘역에서 동쪽으로 약 500m 지점에는 효종비 인선왕후가 부친(장유)의 명복을 기원하기 위하여 건립하였다는 법련사지가 있고, 현재의 법련사는 1989년에 건립하였는데 묘역에서 북쪽으로 약 1Km 지점에 위치해 있다.

장유 선생 묘 및 신도비 오시는 길

좌석버스

301ㆍ320ㆍ350

시내버스

35_장군재마을 하차, 동남쪽으로 15분
(응단말)

문의

(031) 310-6706 (향토사료실)
(031) 310-6708 (문화재담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