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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자신 선생 묘 및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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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자신 선생 묘 및 신도비 사진

류자신 선생 묘 및 신도비

지정번호
향토유적 제4호

지정일자
2000년 1월 31일(2004년 9월 20일 영모재 확대지정)

소재지
능곡동 산32·능골길 26(능곡동 617)

시대
묘-광해군 4년(1612),신도비-광해군 9년(1617),
영모재-고종 22년(1885)·행랑채-고종 6년(1869)

소유자
문화류씨 안산종친회ㆍ시흥시

관리자
문화류씨 안산종친회ㆍ시흥시

류자신(柳自新, 1541~1612) 선생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지언(止彦), 본관은 문화(文化)이다. 명종 19년(1564)에 진사시에 오른 후 김포현령, 광주목사, 한성부 판윤, 개성유수 등을 역임하였고, 셋째 딸이 광해군 비(光海君妃)가 되자 문양부원군(文陽府院君)에 진봉되었다. 묘역은 옥녀국부형(玉女局部形)으로 선생의 묘지문에 따르면 시흥지방의 팔명당(八明堂)에 속한다.

묘의 배치는 특이하게도 류잠(柳潛 1509~1576 공조판서. 류자신의 부친)ㆍ류덕신(柳德新, 1548~1617 돈령부도정. 류잠의 둘째아들)ㆍ류희갱(柳希?, 1561~1583 진사. 류자신의 큰 아들)ㆍ류자신의 묘 순으로 배치되어 있다. 묘역 내에 배치되어 있는 석물들은 390여 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거의 마멸되거나 훼손되지 않고 잘 보존되어 있어 훌륭한 문화재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다른 묘역에 비해 석물 배치에 큰 차이는 없으나 상석 옆 양쪽에 향로석 이외에 또 다른 받침돌이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신도비는 묘역에서 동남 방향으로 약 400m 지점에 자리잡고 있다. 이 비는 본래 현 위치에서 동쪽으로 약 150m 지점에 있었던 것인데, 자손의 번성을 위하여 광복 직후에 당시 돈 8만원의 거금을 들여 이전하였다고 한다. 총높이는 약 4.1m로 귀부는 길이 2.73m, 높이 87cm, 폭 1.87m에 이르며, 비신은 높이 2.07m, 폭 1.14m, 두께 35cm의 규모이다. 귀두(龜頭)는 우측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는데, 두꺼운 입술에 송곳니가 드러나 있고 몸집에 비해 머리가 큰 특징이 있다. 귀갑(龜甲)을 두른 등 위로는 연화좌대(蓮花座臺)를 마련하여 육중한 비신을 받치고 있으며, 이수의 전·후면에는 두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다투는 쌍룡쟁주(雙龍爭珠)의 형태를 생동감 있게 조각해 넣었다. 광해군 9년(1617)에 세워진 이 신도비의 비문은 진원부원군(晉原府院君) 류근(柳根)이 짓고,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김상용(金尙容)이 전자하였으며, 글씨는 병조참의(兵曹參議) 오정(吳靖)이 썼다. 전액(篆額)과 비제에 시호가 들어갈 두 자리를 비워두었으나 추각(追刻)하지 못하였다.

묘역 아래쪽으로 약 100m 떨어져 있는 재실(영모재)은 고종 22년(1885)에 건립되었는데, 안채·문간채로 구성된 행랑채와 재실인 영모재로 구성되어 있다. 중심 건물인 영모재가 가장 안쪽에 약간 높은 터 위에 자리잡고 있으며, ‘튼ㅁ자’ 형식으로 이루어진 행랑채는 안마당을 가운데 두고 ‘ㄱ자’형의 안채와 ‘ㄴ자’형의 문간채가 마주보고 있는 형태이다. 안채는 잘 다듬은 초석과 기둥과 보, 도리 등의 치목수법, 부드러운 추녀와 시원한 선자연(扇子椽, 부챗살 모양의 서까래)의 면모를 볼 때, 지역의 목수가 아닌 경장(京匠)이 건립한 것으로 추정된다. 행랑채는 고종 6년(1869) 건립되었는데, 시흥관내에 현존하는 가옥으로는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로 생각된다. 건축 연대와 구조적 독특성이 문화재적 가치로 인정되어 이미 향토유적 제4호(2000년 1월 31일 지정)로 지정되어 있던 『류자신 선생 묘 및 신도비』에 포함, 2004년 10월 15일에 추가 지정되었으며, 2008년 9월에 전통방식에 따라 원형에 맞추어 전면 복원·정비하였다.

류자신 선생 묘 및 신도비 오시는 길

좌석버스

1_수질복원센터 입구 하차, 동쪽으로 20분
(능골 동남)

문의

(031) 310-6706 (향토사료실)
(031) 310-6708 (문화재담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