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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량 선생 묘 및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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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량 선생 묘 및 신도비 사진

박동량 선생 묘 및 신도비

지정번호
향토유적 제12호

지정일자
1988년 5월 31일

소재지
군자동 산22-2

시대
묘-인조 13년(1635), 신도비-영조 1년(1725)

소유자
반남박씨 오창공파 종중

관리자
반남박씨 오창공파 종중

박동량(朴東亮, 1569~1635) 선생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자룡(子龍), 호는 오창(梧窓)ㆍ기재(寄齋)ㆍ봉주(鳳洲), 본관은 반남(潘南)이다. 선조 23년(1590)에 문과에 급제하여 호조와 병조의 좌랑을 역임하였으며, 1592년 임진왜란 때 병조좌랑으로 왕을 의주(義州)로 호종하였다. 중국어에 능통하여 의주에 주재하는 동안 왕이 중국의 관원이나 장수들을 만날 때는 반드시 곁에 있게 하여 대중외교(對中外交)에 이바지하였으며, 왕의 신임도 두터웠다. 이듬해 도승지를 거쳐 1596년 이조참판이 되어 동지사(冬至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정유재란 때는 왕비와 후궁 일행을 호위하여 황해도 수안(遂安)에 진주, 민폐를 제거하고 주민들의 생활을 보살폈다. 경기도와 강원도의 관찰사를 거쳐 이조참판, 호조판서 등을 역임하였으며, 선조 때 한응인·유영경·서성·신흠·허성·한준겸과 함께 영창대군을 잘 보호하라는 부탁을 받은 이른 바 ‘유교(遺敎) 7신’의 한사람으로 광해군 때와 인조반정의 정치적 혼란기를 맞아 유배와 복관을 반복하다가 후에 아들 미(?)와 의(?)에 의해 복관되어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저서에 『기재사초(寄齋史草)』ㆍ『기재잡기(寄齋雜記)』ㆍ『방일유고(放逸遺稿)』 등이 있고, 그림으로 「계산초정도(溪山草亭圖)」가 있다.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묘는 군자봉 동쪽 능선에 자리 잡았으며, 묘 아래에는 아들 박미(朴彌, 금양위)의 묘가 있다. 묘역의 석물 배치는 봉분 앞에 상석ㆍ향로석 등과 그 좌우에 묘비ㆍ망주석 등이 있다. 신도비는 묘소에서 동북쪽으로 약 250m 지점에 아들(박미)의 신도비와 함께 서 있다. 신도비의 비문은 이조판서 김상헌(金尙憲)이 인조 19년(1641)에 찬술(撰述)하였으나, 상사(喪事)가 잇달아서 돌에 새겨 세우지 못하다가 영조 1년(1725)에 이르러 그의 5대손인 박사익(朴師益)이 강화유수(江華留守)로 있을 때 세운 것이다. 신도비는 2단의 기단석 위에 석신(石身)을 세우고 그 위에 이수를 올려놓았는데, 첫 번째 기단석은 땅속에 묻혀 크기를 알 수가 없고, 두 번째 기단석은 높이 1.79m, 폭 1.23m이며, 비신은 높이 2.45m, 폭 1.13m, 두께 36cm의 규모인데, 석질은 오석(烏石)에 이수는 두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다투는 형상을 조각해 놓았다.

비문의 글씨는 중추부사(中樞府事) 송시열(宋時烈)이 썼고, 형조판서 민유중(閔維重)이 전자(篆字)하였다. 그리고 신도비의 추기(追記)는 그의 현손 전 장령(前掌令) 박필주(朴弼周)가 기록하고, 글씨는 5세손 강화유수 박사익이 썼다. 1993년 10월 24일에 신도비각과 사적비(글: 단국대 박천규 교수)가 반남박씨 오창공파 종중에 의해 건립되었다.

박동량 선생 묘 및 신도비 오시는 길

시내버스

1ㆍ20ㆍ25_산뒤마을 하차, 서남쪽으로 10분
(산뒤마을과 영각사 사이)

문의

(031) 310-6706 (향토사료실)
(031) 310-6708 (문화재담당)